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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싸운 그들, 삼별초 항쟁은 왜 일어났는가

by 고려역사전문가 2025. 5. 10.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하고도, 마지막까지 칼을 놓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끝까지 싸운 그들, 삼별초 항쟁은 왜 일어났는가는 고려의 국력이 무너진 순간에도 꺾이지 않은 군사조직 삼별초의 항쟁과 그 진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남긴 역사적 의미를 되짚는 이야기다.

삼별초는 누구였는가

삼별초는 단순한 반란군도, 일개 지역 군세도 아니었다. 이들은 고려 무신정권 시절 만들어진 정규군이자, 중앙군과는 별도로 움직이던 최정예 부대였다. 이름 그대로 세 개의 부대로 구성된 이 조직은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 침입 이후 포로 출신 고려인 병사들로 꾸려진 '신의군'으로 나뉘며, 고려 국왕의 호위와 수도 치안, 반란 진압 등을 책임졌다.

최우가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육성된 삼별초는 단순한 군사력을 넘어, 무신정권 자체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몽골과의 전쟁이 이어지고 고려가 강화도에 조정을 옮기면서, 이들은 더욱더 군사적으로 독립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강화도는 외부와 단절된 만큼, 자급자족과 자체 방어가 필수였고, 삼별초는 이 모든 실무를 담당하며 '강화의 주인'이 되었다.

문제는 1270년, 고려가 몽골과의 항전을 멈추고 화친을 택하면서 비롯된다. 원나라의 입김이 고려 조정 깊숙이 스며들었고, 국왕은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한다. 삼별초 입장에선 국가가 자주권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자신들의 존재 이유마저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국왕의 명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강화도에 남아 항쟁을 이어간다. 이는 단순한 반란이 아닌,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전면 항전'의 선언이었다.

그 중심에는 지휘관 배중손이 있었다. 그는 왕명에 반기를 들고, 심지어는 폐위된 왕자 승화후 온을 다시 옹립하면서 고려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이어간다고 주장했다. 이 대담한 결단은 삼별초를 단순한 무장 세력이 아닌, 새로운 정치적 실체로 부상시키게 된다.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싸웠는가

강화도에 남아있던 삼별초는 자신들을 진압하려는 고려·원 연합군에 맞서 섬을 떠난다. 그들이 선택한 첫 거점은 전라남도의 진도였다. 진도는 당시 해상 교통의 요지이자, 방어가 용이한 섬 지역으로 삼별초에게는 새로운 근거지로 적합한 장소였다. 여기서 그들은 '반원정권'이라 할 수 있는 사실상의 독립 정부를 세우고, 자주국가의 상징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진도 시기 삼별초는 단순히 숨어있는 저항군이 아니었다. 문서 발행, 지방 통치, 군사훈련, 외교적 시도까지 다양한 국가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배중손은 일본에도 외교 사절을 보내, 반몽 연대를 도모하려는 시도까지 펼친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그만큼 이들이 단순한 생존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몽골과 고려의 공세는 집요했고, 진도는 결국 1271년 무너지게 된다. 배중손은 패배 끝에 전사하고, 삼별초의 지휘권은 김통정에게로 넘어간다. 그는 잔존 병력을 이끌고 마지막 항전지로 '제주도'를 선택한다. 지금의 제주가 아닌, 당시의 '탐라국'이다.

제주는 삼별초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고립되어 있기에 침입을 어렵게 만들 수 있었고, 바다를 기반으로 한 해상 전술도 가능했다. 김통정은 이곳에 성을 쌓고, 제주 전역을 방어선으로 만들며 치열하게 저항했다. 제주 주민들과의 협력도 있었고, 농업과 어업을 통한 자급 체계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역시 병력과 물자의 한계는 명확했다.

1273년, 몽골의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삼별초는 결국 제주에서 패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김통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전사하거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며, 이로써 약 3년간의 삼별초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항쟁은 무엇을 남겼는가

삼별초의 항쟁은 결국 무력으로는 패배했지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결코 패배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을 세웠으며, 별도의 정권을 운영했다. 이는 고려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제2의 고려'를 꿈꿨던 실험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삼별초가 표방한 자주정신이다. 고려 조정이 외세와의 타협 속에서 자주성을 일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달리, 이들은 끝까지 이를 지키려 했다. 그 정신은 이후 조선 건국기의 민본주의, 조선 후기 의병 운동,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민족 내부의 항거와 자립의식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삼별초는 '민중과 함께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진도나 제주에서 이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단지 군사력 때문만이 아니라 주민들과의 협력과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무신정권의 연장선이면서도, 새로운 민중 기반 저항세력으로 변화해 간 이들의 모습은 매우 상징적이다.

오늘날 진도와 제주에는 삼별초를 기리는 유적이 남아 있고, 각종 기념행사도 치러진다. 그들의 항거는 승리로 끝나지 않았지만, 패배 속에서도 '끝까지 싸운 사람들'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결론

삼별초 항쟁은 고려가 가장 어두운 시기에 보여준 마지막 자존심의 불꽃이었다. 외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신념, 자주와 독립을 향한 절박한 의지, 그리고 민중과 함께한 저항의 역사. 비록 결과는 비극이었지만, 그 과정은 장엄했고,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우리는 삼별초를 통해 질문할 수 있다. 국가란 무엇이며, 주권은 누구의 것인가. 삼별초는 패배 속에서도 역사의 승자로 남은, 진정한 고려의 마지막 병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