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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3대 고종 결혼, 민심, 영토 몽골 침략의 시작

by 고려역사전문가 2025. 4. 25.

고려 23대 고종 결혼, 민심, 영토 몽골 침략의 시작은 고려 역사에서 가장 암울하고도 격변의 시기로 기록된다. 무신정권 하에서 왕권은 이미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외적의 침입, 특히 몽골 제국이라는 거대한 위협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무려 3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왕위를 지켰지만, 그 기간 내내 전란과 정치 혼란, 그리고 무신정권이라는 이중의 벽에 가로막힌 채 외세와 내부의 풍파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재위는 단순한 통치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의 역사였다.

결혼

고종의 혼인은 고려 왕실 전통에 따라 문벌 귀족 가문과의 정략적 혼인 양식을 따랐다. 왕비는 대족장적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지닌 이자겸 계열 귀족 출신으로, 고려의 대표적 명문가와의 혼인을 통해 왕권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혼인은 이전 시대처럼 왕권 강화의 지렛대가 되기보다는, 무신정권이 허용하는 틀 안에서 형식적으로만 기능할 뿐이었다.

고종의 결혼은 실질적인 정국 주도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왕의 배우자가 된다는 것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못했고, 외척 세력의 확장은 무신정권에 의해 견제되거나 배제되었다. 특히 고종 시기의 실권자는 최씨 정권의 절대적 지배자 최우였으며, 국왕과 왕비의 권위는 모두 철저히 제약된 상태였다.

결혼을 통한 정치적 안정이나 민심 확보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였고, 왕실의 혼인은 고려 사회의 예법과 격식만을 유지하는 의례적 행사로 전락한 상태였다. 실제로 고종은 왕비뿐 아니라 여러 후궁에게서도 자녀를 두었지만, 후계 구도 역시 무신정권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며 개인적 의사보다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방향이 정해졌다.

민심

고종 재위기의 민심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미 수십 년간 이어져 오던 무신정권의 전횡에 백성들의 피로도는 극에 달해 있었고, 사회 곳곳에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고종 초기에는 잇단 천재지변과 흉년, 과중한 세금, 지방 관리들의 수탈 등이 겹쳐 민생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민심의 전환점은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이었다.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몽골군의 공격은 단순한 외침 그 이상으로, 고려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무신정권은 전쟁 초기 체계적인 대응에 실패했고, 고종은 수도 개경이 위험해지자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는 민심의 안정이 아닌 피난의 성격이 강했으며, 개경 주민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에게 정부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을 안겼다.

천도 이후에도 민심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강화도는 궁궐과 관료 조직만 이전됐을 뿐, 대다수 백성은 여전히 전쟁의 한가운데에 남겨져 있었고, 몽골군은 해마다 침입을 감행하며 고려의 지방을 초토화했다. 민심은 피로감과 분노, 그리고 체념으로 가득 찼고, 이는 농민 봉기와 도적 집단의 증가로 이어져 사회 불안이 극대화되었다.

이러한 민심의 분열과 고통 속에서도 고종은 무신정권의 눈치를 보며 실질적인 민생 안정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고, 전란 상황에서 국왕의 존재감은 더욱 희미해졌다. 그가 민심을 직접적으로 얻는 리더십을 발휘하기에는 무신정권이라는 절대 장벽이 너무 높았고, 외적의 압박은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졌다.

영토

고종 시대의 영토 문제는 방어의 전쟁이었다. 그 어떤 왕보다도 영토를 지키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곧 고려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몽골 제국은 단순한 이민족이 아닌, 유라시아를 통일하고 있던 거대 제국이었고, 고려는 그들의 동쪽 확장의 통로로 지목되었다.

123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몽골의 침입은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고종은 그 전쟁의 한복판에서 왕위에 있었다. 1232년 강화도 천도는 일시적인 피신이었을 뿐, 몽골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국토의 상당 부분이 초토화되었다. 특히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의 주민들은 수십 차례에 걸친 침입과 학살, 약탈, 징발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았다.

고려는 요새화된 섬인 강화도에서 중앙 정부를 유지하면서 육지 대부분을 포기하는 전략을 택했지만, 이것은 곧 실질적인 통치력 상실로 이어졌다. 국왕은 해상 방어 거점에 머물며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고, 군현은 자치 혹은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토 보전이라는 측면에서는 고종의 통치가 '수동적 방어의 시대'로 요약되며, 이 시기 고려의 영토는 물리적으로는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인 통제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강화도 조정은 몽골과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강경파 무신들의 반대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이로 인해 전쟁은 더욱 장기화되었다.

결론

고려 23대 고종의 재위는 겉으로는 장기 통치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 인물이 얼마나 무력한 정치적 현실에 갇혀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결혼은 정통성과 명분을 유지하는 도구였을 뿐이며, 민심은 무신정권과 외침 속에 피폐해져 버렸다. 영토는 지키고자 했지만, 정작 많은 백성이 지키지 못한 채 희생되었고, 왕은 육지 아닌 섬에서 현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왕이었지만 지휘관은 아니었고, 통치자였지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는 몽골이라는 외세와 최씨 무신정권이라는 내압 사이에서 줄곧 타협과 생존을 모색해야 했던 나약한 조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고려라는 나라가 끝내 살아남았다는 점은, 왕 개인의 능력보다 백성과 지배층의 집단적 생존의지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국 고종의 재위는 ‘몽골 침략의 시작’이라는 역사적 무대 위에서 고려가 어떤 식으로 견디고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긴 호흡의 기록이며, 고려가 살아남기 위한 첫 번째 대전환의 서막이었다. 그 이름은 강력하지 않았지만, 격랑 속 고려의 중심에 고종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