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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대 왕건 개혁, 갈등, 종교 후삼국 통일의 종장

by 고려역사전문가 2025. 7. 11.

고려 1대 왕건 개혁, 갈등, 종교 후삼국 통일의 종장은 전쟁과 분열, 혼란으로 점철된 한반도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그가 이룩한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 격렬했던 정치적 갈등의 순간들, 종교를 정치와 문화의 중심축으로 끌어올린 배경, 그리고 마침내 고려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하나로 모은 여정을 따라가 봅니다. 지금 다시 왕건을 이야기하는 건, 단지 역사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분열의 시대에 통합의 길을 찾고자 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

왕건의 개혁은 단칼에 제도를 바꾸는 식의 격렬함보다는,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나라의 틀을 다시 세워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 그저 깃발 꽂고 왕좌에 앉는 것으로 끝났다면, 고려는 오래가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나라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다루었습니다. 상처난 곳을 꿰매고, 찢어진 민심을 봉합하고, 무너진 질서를 천천히 세워나갔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호족들과의 관계입니다. 왕건은 싸워서 이기는 쪽이 아니라, 끌어안고 함께 가는 쪽을 택했습니다. 각지에 흩어진 강력한 호족들을 무조건 복속시키는 대신, 혼인으로, 인사로, 이해로 설득하며 하나의 정치 공동체를 만들어갔습니다. 실제로 그가 정략결혼을 통해 연을 맺은 가문은 30곳이 넘는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단순한 정략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함께 만들어갈 동반자였던 셈이죠.

그리고 나라를 꾸리기 위해선 경제가 먼저였습니다. 그가 내린 조치들은 대부분 백성의 삶과 직결된 것들이었습니다. 무리한 세금은 줄이고, 전란에 피해 입은 지역엔 토지를 다시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복지국가의 기초’라고 부를 수 있는 조치들이었고, 그것이 고려라는 나라가 시작부터 백성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건, 훈요십조입니다. 왕건이 세상을 떠나며 후손들에게 남긴 열 가지 조언이죠. 읽어보면 그저 유훈이 아닙니다. 마치 지금 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장기적 로드맵을 그려놓은 것처럼 구체적이고 깊이가 있습니다. 그 안엔 정치, 외교, 종교, 민심, 그리고 후계자 교육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후대의 방향까지 내다봤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개혁은 드러나는 것보다 안 보이는 곳에서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왕건의 개혁이 그랬습니다. 호흡은 길었고, 말보다 실천이 많았고, 결코 화려하지 않았지만 한 걸음씩 나아간 덕에 고려는 500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갈등

왕건이 이룬 통일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피 흘린 전장 뒤에는 끝없이 이어진 조율과 설득, 때로는 절박한 선택이 있었죠. 그는 칼을 들 줄도 알았지만, 칼을 내려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그를 ‘정복자’가 아니라 ‘통합자’로 만든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정치 여정에서 첫 번째로 부딪힌 벽은 궁예였습니다. 처음엔 충실한 부하였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궁예는 광기에 가까운 독단적 통치를 일삼았고, 결국 왕건은 민심과 신하들의 뜻을 모아 그를 몰아냅니다. 당시 상황을 단순한 쿠데타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 결정이 오히려 나라를 구했다는 평가가 많기 때문입니다. 왕건의 결정은 ‘타인을 끌어내림’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켜냄’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 다음은 견훤과의 대결. 수없이 맞붙고, 질 때도 이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마지막 결정적 순간엔 무력이 아닌 심리전이 빛을 발합니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났을 때, 왕건은 그를 포용합니다. 말 그대로 적장을 적이 아닌 ‘사람’으로 대했던 거죠. 이 장면 하나만 봐도 왕건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사람 중심의 사고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내부에서도 갈등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호족들이 명분과 욕심 사이를 오가며 왕건을 시험했고, 그는 때로는 참고, 때로는 결단하면서 중심을 지켜냈습니다. 결국 그 균형은 왕건 사후에 무너지게 되고, 광종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비가 시작되죠. 하지만 그런 과도기를 가능케 한 것 자체가, 왕건의 중재와 절충이 어느 정도까지 성공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외부로는 거란과 여진 같은 북방 세력과의 긴장이 이어졌습니다. 직접적인 충돌은 적었지만, 그는 늘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습니다. 훈요십조에서도 북방 민족에 대한 경계심을 수차례 강조한 걸 보면, 단기 승리보다 장기 생존을 바라봤던 그의 시선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을 없앨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다루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왕건은 힘만 믿지 않았고, 사람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고려를 있게 한 거죠.

종교

종교는 단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려 사회에서 불교는 정치였고, 문화였고, 공동체를 잇는 실질적인 연결 고리였습니다. 왕건은 이걸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단순히 ‘믿었다’고 말하기엔, 그의 종교 활용은 너무도 정교하고 치밀했죠.

그는 불교를 통해 왕권을 신성화했습니다. 당시에 왕은 하늘의 명령을 받은 존재로 인식되어야 했고, 불교는 그 신성함을 대중에게 설득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왕건은 여러 차례 미륵불의 현신처럼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런 종교적 이미지는 민심을 끌어모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찰은 단지 기도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배움의 장소이자 복지의 공간이었고, 약재가 준비되고 의술이 펼쳐지는 실질적 생활 기반이었습니다. 최근 평양에서 발견된 사찰터 유물은 고려 초기 사찰이 약방과 교육 기능을 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요. 종교가 곧 삶의 터전이었다는 의미죠.

왕건은 불교 외에도 도교나 무속을 무조건 배척하진 않았습니다. 훈요십조에선 도교에 대한 비판이 나오긴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민간 신앙을 일정 부분 수용하는 유연함을 보였습니다. 민심은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고, 종교 역시 정치를 넘어 백성과 함께 숨 쉬는 문화라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했습니다.

종교를 믿는 동시에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이 가진 본질을 잃지 않으려 했던 왕건. 그런 점에서 그는 정치가이면서도 신앙을 가볍게 보지 않은 보기 드문 통치자였습니다.

결론

왕건을 단지 '고려를 세운 왕'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부족합니다. 그는 더 깊이 있는 리더였고, 한 시대의 질서를 바꾼 설계자였습니다. 싸움만 잘해서 통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고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리더였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가 남긴 훈요십조를 다시 읽으면, 단지 유훈이 아니라 한 나라를 세운 사람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종교를 어떻게 활용하고, 북방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인재를 써야 하는지까지도 구체적이죠.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그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왕건을 돌아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혼란한 시대에 길을 내고,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고,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로도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후삼국 통일의 종장은 단지 전쟁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포용과 통합의 시대로 넘어가는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백성’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었던 왕건이 있었죠.

역사는 끝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배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왕건은 그 이름만으로도 지금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너희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