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외교는 왜 흔들렸나? 송·요·금·원과의 실전 관계사를 통해 시대별 외세의 압박과 고려의 전략적 대응 방식을 살펴봅니다. 각 국가와의 관계 변화를 통해 고려가 처한 국제 정세와 외교적 생존 전략, 그리고 자주와 굴욕 사이에서 선택한 길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송과의 우호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 대륙의 정통 왕조와의 외교를 중시했습니다. 바로 송나라와의 관계가 그것이었습니다. 송과의 외교는 단순한 외교 관계를 넘어 문화와 제도의 수입, 더 나아가 국가 정체성 확립과도 직결된 중요한 연결고리였습니다.
이렇게 강조할 수 있는 이유는 송이 한족 중심의 전통 왕조였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당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 대륙에 새롭게 들어선 송을 '정통 문명국'으로 인식했고,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이를 적극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광종은 송에 사신을 보내 왕위를 책봉받았고, 송의 유교 제도와 문물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고려가 시행한 과거제도와 국자감 설치 등은 모두 송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죠.
이런 외교 흐름 속에서 고려는 '중화 문명'과의 유대감을 통해 자국의 정체성과 위상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송과의 무역은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금은, 비단, 도자기 등 다양한 문물이 고려에 들어왔고, 고려의 청자와 인삼 등은 송에서도 인기를 끌며 상호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그렇듯, 송과의 우호가 영원한 안정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북방에서 요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며 송과의 관계는 긴장을 동반하게 되었고, 고려는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맞춰야 했습니다. 이는 고려 외교가 송과의 문화적 유대와 함께, 실질적인 안보 위협에도 대응해야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와의 긴장
요나라는 송과는 달랐습니다. 문화 교류보다는 군사력과 정치적 우위에 기반한 관계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거란족이 세운 요는 고려의 북방을 직접적으로 위협했고, 실제로 여러 차례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면서 양국 관계는 팽팽한 긴장 속에 놓이게 됩니다.
요와의 대립은 곧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외교 노선과 충돌했습니다. 993년, 거란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송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수교하라는 요구를 합니다. 당시 서희는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탁월한 담판 외교를 보여줍니다. 그는 단순히 전쟁을 피하는 수준을 넘어서, 압록강까지의 영토를 확보해내며 외교사에 길이 남을 교섭을 이끌어냈죠.
이처럼 요와의 긴장은 고려가 단순히 방어적 입장에서만 대응한 것이 아니라,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외교 전략도 함께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거란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성종과 현종 대에 걸쳐 세 차례의 거란 침입이 고려를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끝내 요에 굴복하지 않고 자주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면서도 고려는 내부 체제를 정비했고, 외교적으로는 송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 사회에서의 자주적 지위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요와의 관계는 '힘과 외교의 이중전선'이었습니다. 단순한 군사적 긴장만이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려가 얼마나 유연하고 지혜롭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서희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고려는 외교로 전쟁을 막는 선택지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금과의 전환
요가 쇠퇴하고 금나라가 부상하면서 고려 외교는 다시 한 번 중대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금은 여진족이 세운 새로운 강대국으로, 거란을 무너뜨리고 북방을 지배하게 되었죠. 이에 고려는 금에 대한 새로운 외교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고려는 처음엔 송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 했지만, 금이 송과 대립하자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금에 사대를 표하며,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습니다. 1100년대 초반 인종 때의 금 사신 접대 사건, 이자겸과 척준경의 등장 등은 고려가 금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한 시도 속에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이기도 했습니다.
왜 고려는 금에 굴복했을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요의 침입을 막아낸 경험이 있긴 했지만, 거듭된 외교 갈등과 내부 권력 구조의 불안정, 그리고 무엇보다 금이 지닌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고려는 실리 외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는 금에 외교적으로는 사대, 내부적으로는 자주를 유지하는 이중 전략을 펼치게 됩니다. 명분상으로는 금을 상국으로 섬겼지만, 실제 통치 체제나 문화면에서는 고려의 독자성이 유지된 것이죠.
이 시기는 외교 정책이 ‘현실적 유연성’을 띤 시기였습니다. 굴욕적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당시 국제 정세에서 고려가 생존을 선택한 방식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금과의 외교를 통해 전쟁 없이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원과의 종속
가장 큰 외교적 전환점은 역시 몽골의 등장이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 외교사에서 가장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운 상대였습니다. 몽골은 단순한 외교 대상이 아니라, 고려의 실질적 지배자에 가까웠습니다.
13세기, 몽골이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며 고려에 침입을 시작한 후 30년 이상 지속된 항쟁 끝에 고려는 결국 원의 부마국이 됩니다. 이는 외교라기보다는 사실상 종속에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국왕은 원 황실의 사위가 되었고, 고려의 왕위 계승은 원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원나라 복장을 입고 의례까지 따르는 등 자주성은 현저히 약화되었습니다.
원과의 관계는 왜 이토록 무겁고 긴 어둠의 시간을 남겼을까요? 몽골의 군사력은 고려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내부에서도 권문세족과 같은 친원 세력이 점차 힘을 가지며 현실을 받아들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고려는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도 개경 환도, 성리학 도입, 불교 정비 등 내부 개혁을 시도했고,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반원 정책을 추진하며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즉, 원과의 외교는 굴종의 외피 속에서도 고려가 자주와 회복을 위한 기회를 끈질기게 엿본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과의 외교는 고려의 존립을 위협했던 가장 혹독한 시기였지만, 동시에 자주를 회복하고자 했던 역사적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결론
고려의 외교사는 단순히 송·요·금·원이라는 네 나라와의 관계만으로 정리되기엔 그 깊이가 너무도 깊습니다. 외세의 위협 속에서 고려는 문화적 연대와 실리적 타협, 그리고 때로는 굴욕적 선택까지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송과는 문명을 공유하며 자주를 꾀했고, 요와는 담판과 전쟁으로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금과는 실리를 위해 유연하게 접근했고, 원과는 종속을 견디며 자주를 다시 찾아가려 했습니다. 고려는 이처럼 외교의 연속성과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길을 끊임없이 모색했습니다.
결국 고려의 외교사는 굴욕만도, 승리만도 아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한 치열한 생존의 역사였습니다. 이 점에서 고려는 단순한 약소국이 아닌, 지혜롭고 복합적인 선택을 해온 국가로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